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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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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영유권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을 고취시키고자 방을 신설했습니다. 앞으로 많은 자료와 정보를 제공해드리겠습니다.

[한국의 북방 영토는 압록강과 두만강이 아니다.]

만주대륙은 단군조선이래 한민족의 고토였으며, 삶의 주된 무대였다. 따라서 만주와 한반도를 경계짓는 압록강과 두만강은 한민족 활동무대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고구려에 이어 발해가 멸망함에 따라 한민족은 한반도라는 공간적 범위 내로 활동영역이 축소되었다.
이후 압록강과 두만강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 동북일대는 거란과 여진의 활동무대가 되어버렸다. 특히 청대에 들어와 청조가 동북지구에 대해 봉금정책을 실시하게 되자 이 지역은 사실상 무인지경이 되어 버렸다. 그 후 청말에 이르러 많은 조선족은 간도에 점차적으로 이주하여 이들 무인지대의 땅을 개간하면서 거주하게 되자, 조선족과 중국인들간에 충돌이 잦아지게 되었다. 이에 당시 청의 황제였던 강희제의 명을 받은 오라지방 총관 목극등이 1712515일 백두산 천지의 서남부에 백두산정계비를 건립하였다. 이 정계비는 나중에 한·중간의 국경을 나타내는 표석이 되었다.
이 표석은 서쪽으로 압록강과 동쪽으로 토문강을 경계로 국경선을 삼는다고 기록하였다. 만일 이 정계비의 기록되로 판단한다면, 서쪽의 압록강으로 하는 국경선에는 커다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동쪽으로 흐르는 토문강은 요즘 흔히 말하는 두만강이 아니라 송화강이다. 특히 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은 백두산정계비의 근처에서 발원하여 송화강을 거쳐 흑용강으로 흘러 동해로 유입되는 강이다. 이러한 사실은 규장각에 소장된 「白頭山定界碑略圖」에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따라서 청의 강희제때 목극동이 건립한 백두산 정계비에 의한 한·중국간의 국경은 송화강과 흑룡강으로 이어지는 하천이 될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영토는 1909년에 일본의 주도하에 중·일간 체결된 간도협약에 따라 청의 영토로 넘겨지게 되었다. 당시 중·일간에 체결된 간도협약은 일본이 남만철도의 안봉선 개축문제로 청과 흥정하여 남만주의 철도 부설권을 얻는 대가로 그동안 조선정부와 청조 사이에 국경문제에서 미해결 상태로 남아있던 간도지방을 청에 넘겨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간도협약은 1945년에 일본이 패망하면서 이전에 체결되었던 국제간 조약이 모두 원인무효가 되었으므로, 일제의 간도협약에 의한 간도지방의 청국이전은 원천적으로 무효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청나라가 일방적으로 설정되었다 할지라도, 백두산정계비의 銘文에 의해 한·중간의 국경선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상응한 조치를 다시 취해져야 할 것이다.
그동안 한·중 양국은 이념의 차이 등으로 인해 서로 교통이 없었고, 또 이 문제에 대한 한국정부의 태도 역시 적극적이지 않았으므로 아직까지 양국정부 모두 어떠한 의견이 표명되지 못하였다. 그런데 국제법상으로 영토문제에 관한 시효만기는 100년 간이다. 따라서 1909년으로부터 만 100년이 되는 2009년 이전에 간도영유권에 대한 우리의 의견을 내외에 천명하고, 아울러 이 문제를 국제법에 기반하여 국제사법위원회에 상정해야 한다. 설사 우리세대에서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다음세대에 연결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조치는 취해야 한다. 최근 중국정부가 한국으로부터의 간도영유권 제기에 대비하여 조선족자치구를 형성하여 살고있는 조선족에 대해 분산정책을 쓰고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각오를 새롭게 하고 있다.
본 백산학회에서는 1966년 창립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고대사를 연구해오면서 간도에 대한 자료발굴과 연구에 집중해왔다. 또한 그동안의 자료발굴 및 연구를 재정리하여 '971129일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한민족의 북방영토의식과 간도영유권문제'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이에 관한 국민의 관심을 재고시키고자 하였다. 아울러 백두산정계비에 의한 토문강과 두만강이 다른고지도를 전시하여 근거를 제시한 바 있다.

 

백산학회 간사 육낙현